김영하 작가의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에 걸린 연쇄살인자의 시선으로 펼쳐지는 독특한 심리 스릴러입니다. 원작은 발간 당시부터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후 영화화되면서 원작 팬과 일반 관객 모두의 큰 관심을 모았습니다. 이 작품이 특히 돋보이는 지점은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를 서사의 중심에 놓았다는 점입니다. 다만 소설과 영화는 동일한 뼈대를 공유하면서도 서로 다른 방식으로 독자와 관객에게 접근합니다. 원작 소설이 1인칭 시점을 통해 주인공의 내면을 직접 체험하게 한다면, 영화는 시각적 연출과 배우의 표현을 통해 이를 재구성합니다. 아래에서는 원작과 영화의 서사 구조 차이를 중심으로 비교하고, 그 차이가 독자와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원작 소설: 1인칭 시점이 주는 내면의 몰입감
원작 소설 살인자의 기억법은 치매에 걸린 주인공 ‘병수’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이 시점은 독자로 하여금 병수의 혼란스러운 기억 속으로 직접 뛰어들게 만듭니다. 병수는 과거에 저질렀던 범행과 현재의 일상을 구분하지 못하고, 현재 진행 중인 사건조차 과거의 잔상과 겹쳐서 인식합니다. 이러한 혼란은 독자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며, 동시에 병수의 내적 독백이 독자를 그의 머릿속으로 완전히 끌어들입니다.
소설에서 1인칭 시점은 단순한 전달 도구가 아니라 병수의 ‘기억 장애’를 체험하게 만드는 장치입니다. 특정 장면에서 병수가 누군가를 쫓아가다 갑자기 전혀 다른 장소에 있다는 서술은 독자에게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기억의 왜곡인가”라는 질문을 던집니다. 이 기법은 독자의 판단을 흐리게 만들면서도 병수의 불안정한 정신 상태를 생생히 전달합니다. 결과적으로 원작은 ‘이야기’보다 ‘시점’을 통해 강렬한 몰입감을 만들어내며, 독자는 주인공의 불안정한 의식을 체험하게 됩니다.
영화: 시각적 연출과 배우의 표현을 통한 외적 체험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작의 1인칭 서술을 그대로 옮겨올 수 없기에, 시각적 장치와 연출을 활용해 병수의 기억 장애를 표현합니다. 배우의 섬세한 연기는 혼란스러운 표정, 갑작스러운 망각, 현실과 환각이 뒤섞이는 순간들을 실감 나게 보여줍니다. 소설이 언어로 독자의 상상력을 자극한다면, 영화는 화면과 사운드를 통해 이를 직접 시각화합니다.
특히 영화는 편집 기법을 적극적으로 활용합니다. 동일한 장면을 다른 시점에서 반복하거나, 인과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장면 전환을 통해 병수의 혼란을 관객이 체험하도록 만듭니다. 이 과정에서 관객은 “이것이 실제로 일어난 일인가, 아니면 병수의 기억 속 왜곡인가”라는 의문을 가지며 혼란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영화는 소설에서 간접적으로 묘사되던 긴장과 불안을 시각적 폭력성·추격 장면·빠른 전개 등으로 극적으로 보여주어, 대중이 기대하는 스릴러적 재미를 제공합니다. 다만 이러한 연출은 원작이 주었던 내밀한 심리적 공포보다는 외적 긴장감에 무게를 두게 되는 차이를 낳습니다.
서사 구조의 변형이 주는 의미
소설과 영화의 차이는 결국 ‘독자가 느끼는 혼란’과 ‘관객이 체험하는 혼란’의 양상에서 갈라집니다. 원작 소설은 1인칭 시점으로 독자가 병수의 머릿속에 갇히는 듯한 경험을 제공합니다. 독자는 병수가 믿을 수 없는 화자임을 알면서도 그의 시선을 따라갈 수밖에 없고, 그 결과 진실과 거짓이 뒤섞인 심리적 스릴러의 본질이 극대화됩니다.
반면 영화는 관객이 병수를 완전히 따라가기보다는 병수의 혼란을 외부에서 관찰하게 만드는 구조를 택합니다. 영화 속 병수는 중심 인물이지만, 그의 내적 혼란은 편집과 연출로 보여지는 것이지 직접적 체험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영화는 ‘내면적 공포의 전달’보다는 ‘외부적 긴장감의 조성’에 초점을 두며, 장르적으로는 전형적인 스릴러의 색채가 강해집니다. 이러한 구조적 차이는 원작과 영화를 서로 다른 작품으로 만들고, 각 매체가 남기는 정서도 달라지게 합니다.
결론: 원작과 영화, 서로 다른 방식의 기억 체험
살인자의 기억법은 원작과 영화 모두에서 ‘기억의 왜곡’을 중심 주제로 삼지만, 매체적 특성에 따라 전혀 다른 경험을 제공합니다. 소설은 1인칭 시점을 통해 독자를 병수의 머릿속에 가둠으로써 심리적 혼란을 직접 체험하게 만들고, 영화는 시각적 장치와 배우의 연기를 통해 그 혼란을 외부에서 관찰하게 하며 대중적 스릴을 강조합니다. 두 작품은 단순한 원작-각색 관계를 넘어 동일한 이야기를 서로 다른 방식으로 체험하게 하는 ‘서사적 변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독자는 소설에서 병수의 내면을 탐험하며 강렬한 불안을 경험하고, 관객은 영화에서 외부적 긴장과 서스펜스를 체험합니다. 이러한 차이야말로 원작과 영화가 각자의 방식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핵심이며, 우리가 두 작품을 나란히 비교해 감상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